석사를 붙고 나서의 기쁨도 잠시, 나의 경우에는 1학년의 1학기를 시작하고 나서 많은 장애물에 부딪히게 되었다. 네덜란드에서의 2년간의 석사 생활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네덜란드의 대학교 규정 중에 하나가 모든 학생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바로, Redo라는 악명 높은 제도이다. 유럽의 학교가 그렇듯, 네덜란드는 대학 입시에는 특이점이 있는데, 입학은 조금 수월한 반면에 졸업이 굉장히 어려운 편으로 알려져 있다. Redo/Resit 제도는 네덜란드에서 대학교를 다니는 1학년들은 꼭 거쳐가야 하는 제도이다. 네덜란드의 대학에 입학 한 1학년 학생들은 각 학기마다 시험을 치러야 했고, 최종 과목 시험에서 fail을 받으면 방학 때 그 시험을 다시 한번 더 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나는 이 제도를 장난 반 진담 반으로, 친구들과 단두대 매치라고 불렀다. 시험을 치고 난 후 목을 단두대에 올리고 기다리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재 시험에서 몇 과목 이상 불합격이 된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지옥불이 눈앞에 펼쳐진다. 한 학년을 통째로 다시 듣고 시험을 다시 치거나, 학교에서 스스로 나가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EU 국가에서 오지 않은 학생들은 이 제도가 굉장히 불합리하다고 느낄 것이다. 이미 일반 EU 국가에서 온 학생들과는 다르게, 큰 학비를 내고 학교를 다니는데 1년 치 학비를 다시 내라는 말은 논 EU 학생들에게 너무 양아치 같은 말이 아닌가! 이 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이 떨어져 나간다. 실제로, 네덜란드에는 우스갯소리로 600명이 한 과에 입학을 해서 졸업할 무렵 즈음 120명만 졸업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친구네 학교가 그렇긴 했음.) 약간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이 제도는 오직 1학년 학생들에게만 적용되는 제도란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Resit 제도는 1학년 때부터 이 전공이 적성에 맞는지 안 맞는지를 가려내는 일종의 필터라고 말할 수 있겠다. 참고로 말하자면, 이 제도는 학사뿐만 아니라 석사에게도 적용되는 무시무시한 제도다.
누군가가 Redo를 받게 된다면, 그 소식은 학교의 석사 1학년 전체에 소문이 되고, 가십거리가 된다. ‘이 학생이 우리 학교를 계속 다니고 졸업을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우리 학교의 인재가 아닐 것인가?’를 논점으로 두고 가십을 즐기는 사람들이 상상이상으로 많다. 그래서, 재 시험을 치러야 하는 학생들은 생각보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네덜란드에 유학을 오는 학생들 중에서는 이 사실을 잘 모르고 입시를 준비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경험자의 입장에서, 학사 석사 둘 다 무사히 졸업하기 위해서는 첫해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아무리 영어시험을 패스하고 네덜란드에 온다 한들, 아카데믹 영어는 영어에 익숙하지 않으면 따라가기가 굉장히 어렵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논 EU 학생의 입장에서는 정말로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수업도 해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하고, 친구들과의 사교모임도 해야 하고 정말로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다. 하지만, 하나를 잡으면 하나는 포기를 해야 하는 불상사가 생기기 마련이다. 네덜란드의 석사 생활은 그야말로 서커스의 저글링과 같았다.
나의 경우에는 첫해에는, 네덜란드에서 학업 도중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대부분의 집중력과 창의력을 분배하였고, 두 번째 해에는 논문을 쓰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특히나, 미술대학의 특성상 논문을 완성하고 난 이후, 이 논문을 토대로 작품을 만들어야 했던 부분에서 가장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내가 이 학교에 맞는지에 대한 의문을 계속해서 가져왔었던 것 같다. 졸업만을 긴 마라톤의 목적지로 지정하고 달려왔던 나는, 미래를 생각하니 숨이 턱턱 막혔다. 졸업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졸업 후 나의 미래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해야만 했었다. 학교 특성상 미대는 취업과 관련된 수업보다는 아티스트 육성 중심의 교육과 비판적 사고방식을 가르치기 때문에, 졸업 이후에 직장을 찾고 아티스트로 살아남는 것은 오롯이 본인의 몫이 된다. 2023년 6월, 졸업을 앞둔 몇 개월 전의 나는 많은 생각들이 스쳐갔다.
매년 네덜란드의 큰 미술대학에서 졸업을 하는 인원들의 수를 생각하면, 몇천 명 중 명성이 있는 아티스트의 비율은 정말로 적을 것이다. 나의 석사 생활 동안, 나는 큰 포부를 안고 네덜란드로 온 것은 아니지만 혹여나 내가 원하고자 하는 바가 있는데, 이루지 못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생각을 자주 하고는 했다. 그리고, 졸업 전 최후의 판단을 내렸는데, 나는 우리 학교의 졸업생들과는 다른 아티스트의 길이 아닌 취업의 길을 걷기로 했다.
누군가에게는 유럽에 있는 아트스쿨까지 와서 아티스트가 아닌 취업의 길을 걷다니 미친 소리냐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아트스쿨들은 우리의 미래를 책임져 주지 않는다. 냉정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아트스쿨은 우리에게 아무리 좋은 교육을 제공한들, 그것을 토대로 취업을 하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졸업생들은 그냥 사회로 내던져지고 스스로 먹고 살 길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이는 유럽 국적이 아닌 외국인으로서 살기 힘든 것이 바로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