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딪히며 자라나는 시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 가을이 왔다. 이 계절이 오면 나는 자연스럽게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된다.
돌이켜보면 내 삶에는 여러 시기가 있었다. 시기마다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고, 그 변화 속에서 나라는 사람의 조각들이 하나씩 만들어졌다. 예전에는 변화라고 하면 환경이 바뀌는 것으로 생각했다. 비행기를 타고 다른 나라로 가고, 새로운 집에 짐을 풀고, 처음 보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 한국에서 영국으로 올 때도, 영국에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때도, 그리고 다시 이곳으로 올 때도 그랬다. 삶이 바뀌었고, 나는 그에 적응하느라 바빴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다르다. 사는 곳이 바뀐 것도, 하는 일이 크게 달라진 것도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 내 일상은 작년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나는 내 안에서 여러 가치가 충돌하고 부딪히며 깨어졌다. 떠나지 않고, 있는 자리에서 부딪히며 나라는 사람을 재정립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이런 변화가 나에겐 더 큰 영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환경이 바뀔 때는 새로운 것에 나를 맞추면 되지만, 제자리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이미 내 안에 있던 것들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했다.
그렇게 부딪히다 보니 알게 된 게 있다. 이전에 배웠던 것들과 경험 덕분에 좀 더 수월하게 넘어가는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어떤 것들은 아무리 애써도 섞이지 않는다. 물과 기름처럼, 한쪽을 택하면 다른 한쪽을 조금은 내려놓아야 하는 것들이 있다. 그런 선택들 앞에서 나는 여전히 망설이고, 선택지가 있다는 점에서 더 큰 혼란을 마주하기도 했다. 그것은 나의 진로에 대한 고민이기도 했고, 가치에 대한 고민이기도 했고, 삶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이기도 했다.
나를 다시 정리해 나가는 이 과정은 어쩐지 짐 정리를 닮았다. '이번엔 진짜 다 정리해야지, 버릴 건 과감히 버려야지'라고 다짐하며 시작하지만, 미련 많은 나는 결국 거의 아무것도 버리지 못한다. 하나하나 꺼내 들여다보다가 '아, 이게 다 필요한 거였구나' 하고 다시 제자리에 넣어 두게 되는 것이다. 어떤 것들은 이미 내 정체성의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떼어내려 해도 떼어낼 수가 없었다.
언젠가 친구가 런던에 놀러 왔을 때, 서로 안부를 묻다가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정말 많은 일이 있었고 오르락내리락하기도 했는데, 막상 말로 하려니 "그냥 그 자리에서 똑같이 지냈어"라는 한마디로 끝나 버리더라고. 지금도 그렇다. 다만 이곳에서 부딪히고 깨어지며 나의 삶을 계속 빚어 가고 있다.
나는 늘 떠나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남아 있고 싶었다. 어쩌면 나는 떠나는 대신 머무는 법을 처음 배우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