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와서야 보이는 것들
10월의 마지막 날, 한국에서 영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이번 한국 방문은 조금 특별했다. 영국 회사 소속으로 한국의 바이오 컨퍼런스에 패널로 초청받아 참석한 첫 출장이었기 때문이다.
영국에 온 지 4년, 유학을 결심한 지는 5년이 되었다. 5년 전 한국에서 성북천을 따라 걸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해하던 내가, 이제는 영국 회사의 명함을 들고 한국으로 출장을 왔다. 이 정도면 나름의 금의환향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물론 현실은 발표 준비에 시차 적응 실패, 매일 이어지는 미팅까지 더해져 정신없는 일주일이었지만, 그만큼 너무나 행복한 시간이었다.
올해 초부터 꾸준히 써 온 글들이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에게 읽히고 있었고, 그 글을 계기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내년에는 협업까지 준비하게 되었다. 언젠가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컨퍼런스 패널도 예상보다 훨씬 빨리 현실이 되었다. 이번 한국 출장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도 사실 무대에 선 순간보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내가 쓴 글을 읽었다며 먼저 인사해 주는 사람들, 같은 산업의 미래를 고민하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나누는 사람들. 다들 나처럼 동물의약품 시장에 진심이어서 업무 미팅이라기보다는 커피챗, 아니 거의 덕질 토크에 가까웠다 ㅋㅋㅋ 머리를 맞대고 이 시장이 더 성장하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그저 내가 재미있어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어느새 그 일이 다른 사람들과 나를 연결해 주는 매개체가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신기했다.
영국에 처음 왔을 때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영어와 네트워크였다. 그런데 지금은 커뮤니케이션이 주된 업무인 일을 하고, 영어로 산업의 미래를 이야기한다. 내가 만든 콘텐츠를 매개로 전 세계의 업계 사람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정작 매일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잘 몰랐다.
매일 조금씩 변하는 사람은 자신의 변화를 알아차리기 어려운 것 같다.
지난 몇 년간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서 매일같이 발버둥치며 살았다. 왜 이렇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냐며 울고불고 악을 쓰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지금 당장은 제자리걸음처럼 느껴져도, 매일 조금씩 움직이다 보면 언젠가는 앞으로 나아가 있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렇게 울다가 스스로를 다독이고 그러기를 계속 반복했던 것 같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 문득 뒤를 돌아보니 정말로 꽤 멀리 와 있다고 느낀다.
얼마 전 채린이가 내년에 꼭 이루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생각해 보니 꼭 이루어야겠다는 것은 없었다. 하고 싶은 일은 여전히 너무 많지만, 요즘은 결과보다 그 과정 자체가 더 재미있다. 예전에는 미래의 목표를 위해 현재를 살았다면, 지금은 현재가 재미있어서 미래가 궁금하다.
10월의 마지막 날 영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데 마음이 요상했다. 이 느낌이 뭘까 하고 돌아오는 비행기 내내 생각했다. 아마도 나의 또 다른 챕터의 시작이라는 설렘이지 않았을까 싶다. 나름 멀리 왔지만 또 다른 시작이라는 설렘.
5년 전의 나는 지금의 내가 어디에 있을지 몰랐고, 지금의 나 역시 5년 뒤의 내가 어디에 있을지 모른다. 다만 이제는 그 사실이 불안하기보다 기대된다.
멀리 와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여기까지 와 보니, 아직 보이지 않는 길들이 더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