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이상한 달이었다.
비행기와 기차를 거의 매주 탈 정도로 출장이 많았고, 너무 바빠서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은 달. 그리고 아마 내 커리어에서 하나의 작은 분기점처럼 남을 달. 뭐랄까 대단한 일이 일어난 건 아니지만 나중에 시간이 흘러 내가 회고를 할 때 그때가 시작이었지 하고 회상할 것 같은 달이었다.
회사 안팎으로 많은 시작과 변화가 있었다.
회사 밖에서는 제약 바이오 전문 언론사인 더파마에서의 기고진으로의 첫 기고글이 발행되었다. [제약 BD가 바라보는 동물의약품 시장의 미래]라는 제목의 연재 시리즈이다. 내가 영국에서 BD를 시작했을 때부터 꾸준히 읽어오던 매체에 이제는 내 이름으로 글을 쓰게 되었다는 게 아직도 조금 신기하다. 익명으로 운영하던 펫벳톡 계정에도 처음으로 내 실체(?)를 공개했는데, 반응이 꽤 폭발적이었다. 기존부터 논의되던 업계 관련 공동저자 책 계약도 확정되었고, UCL의 멘토로써도 활동하고 있다.
회사 내부적으로는 1년 동안 함께 일했던 라인 매니저가 회사를 떠났다. 3개월 간의 핸드오버 기간이 있긴했지만 드디어 그 날이 온것이다. 마지막 주 본사 오피스에 방문했던 주에 라인 매니저 앞에선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호텔방에서 매일 밤 울었다. ㅋㅋㅋㅋ 전남친들이나 최애에게도 준적없는 3장넘는 손편지를 쓰고, 이별을 할때도 이렇게 울었을까? 싶을 정도로 울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좋았다. 아쉬워서 좋았고, 아쉽게 끝나서 감사했다.
막상 그가 떠난 뒤의 나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아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조금 더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새로운 리포팅 라인에 적응해야하지만 막상 그가 떠나니까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그가 떠나고 나니 나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내가 운영진으로 참여한 회사 내 워크샵에서 발표를 맡았고, 현장에서 들은 이야기를 정리했고, 내가 만든 슬라이드로 사람들과 논의했다. 매달 쓰던 리포트에는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들을 더 과감하게 넣었다. 예전 같았으면 “너무 많나?” 하고 줄였을 내용들을 이번에는 그냥 썼다.
그런데 그 발표가, 그 리포트가 새로운 요청으로 이어졌다.
R&D 관련 섹션을 추가해줄 수 있냐는 말. 리더십 미팅에서 발표해줄 수 있냐는 말.
그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묘했다. 누가 나를 밀어줘서 생긴 기회가 아니라, 내가 한 것이, 내가 쓴 것이 나를 앞으로 데려간 기회였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좋은 소식이 생기면 나를 몰라봤던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보란 듯이 잘 살고 싶었다. 내가 이렇게 됐다고, 당신들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 마음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마음도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이번에는 나를 인정해준 사람에게 좋은 소식을 들려주고 싶다. 나를 봐준 사람에게, 당신이 믿어준 사람이 이렇게 잘 성장하고 있다고 보여주고 싶다.
증명하고 싶은 마음과 나누고 싶은 마음은 닮아 있지만, 전혀 다르다.
하나는 과거를 향해 있고, 하나는 미래를 향해 있다.
5월의 나는 그 차이를 배운 것 같다.
아직 모든 것이 안정된 것은 아니다. 계약도, 비자도, 조직도, 앞으로의 역할도 완전히 확정된 것은 없다. 그런데도 요즘 이상하게 하루하루가 선명하다. 불안이 없는 건 아닌데, 불안보다 궁금함이 더 크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날 까 기대하게 된다. 그러니까 살아있는 모든 순간에 감사하게 된다.
라인 매니저가 퇴사 후 3주 뒤인 오늘, 안부 연락을 보내왔다. 새로운 리포팅 라인과는 잘 되어가는 지 등등 다정한 안부인사였다. 마지막 날 내가 악수를 청했을 때 약간 우리 계속 볼건데 왜 이래 이런 느낌을 낭낭히 풍기더만 그리고 다음 달 말 쯤에 런던에서 캐치업을 하자고 했다. 다음 달 말쯤 되면 할 말이 더 많을 것 같다. 그때쯤 더 좋은 소식을 많이 가져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