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문득 든 생각은, 가장 행복한 시기는 지금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한 말이다. 지금 나는 아직 아무것도 "이루지" 않았다. 책을 낸 것도 아니고, 컨퍼런스 무대에 선 것도 아니고, 통장에 찍힌 숫자가 진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인지 10년 뒤의 내가 지금의 나를 가장 부러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는 이 생각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행복은 뭔가를 이룬 다음에 오는 거라고 배웠고, 난 항상 그렇게 살아왔다.
열심히 하면 → 성과가 나고 → 그러면 행복해지는, 그 순서가 맞다고 생각했다. 근데 요즘은 그 순서가 내 삶에서는 조금 다르게 작동하는 것 같다.
아티클을 올리면 누군가 읽는다. 댓글이 달린다. 내가 살면서 대화를 나눌 지도 몰랐던 사람들에게서 연락이 온다. 내 글의 팬이라고, 내 글을 너무 잘 읽고 있다고. 어떻게 그렇게 글을 잘 쓰냐고 나도 너처럼 쓰고 싶다고. 그 알림 하나가 하루를 다르게 만든다.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이력서에 쓸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게 그렇게 기쁘다. 이 모든 것들이 아직 "작은" 것들이다. 세상이 바뀐 것도 아니고, 내 삶이 극적으로 달라진 것도 아니다. 근데 이 작은 것들이 매일 새롭고, 매일 처음이다.
그런데 그게 핵심인 것 같다. 지금은 모든 게 처음이라는 것.
내 룸메이트인 채린이가 나한테 그랬다. 항상 자기는 내가 대단해보였다고. 런던에서 취업을 한 것도, 정리해고를 당하고 다시 재취준을 한 것도, 연뮤덕후로써 공연을 수십번보고 몇백페이지의 리뷰북을 써내는 것도 자기 눈에는 다 대단해보였다고 했다. 자기 눈에는 다 비슷한 수준의 성취로 보이는데 요즘 유독 내가 기뻐하고 행복해보인다고 했다. 난 못 느꼈는데 어쩌면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하나인 채린이가 그렇게 느낀다면 이유는 아마도 이것일 것이다. 내 '존재' 자체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 내가 만들어내는 콘텐츠도 나의 일부이니까. 어쩌면 내 자식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내가 나 자신에게 확신이 생겼다는 것도 한 몫할 것이다. 예전에는 나에게 확신이 없었기에 누군가 내 글이 좋다 해도 왜? 라는 물음표가 떠올랐다. 내 안의 임포스터 신드롬이 고개를 빼꼼하고 내밀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물음표가 사라져가고 있다. 쌓인 것들이 나를 믿게 만들었다. 이게 날 참 단단하게 만듦과 동시에 가볍게 만들었다.
비유를 하자면, 과거의 나는 전속력으로 달리고 싶은데 항상 두 발에 모래주머니를 단 것처럼 속도가 나질 않았다. 온갖 힘을 다 써도 내가 원하는 만큼 나아가질 못했다. 그런데 요즘은 내가 쓸 수 있는 힘의 반도 안 쓰는 것 같은데 날아다니는 것 같다.
10년 뒤에는 컨퍼런스 강연이 일상이 될 것이다. 좋은 일이지만 처음의 떨림은 없을 것이다. 책이 나올 것이다. 기쁘지만 원고 마감의 무게와 함께 온다. 이름이 알려질 것이다. 감사하지만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긴다. 성취가 쌓일수록 잃을 것도 같이 쌓인다.
아직 일어난 일도 아닌데 이런 말을 하는 게 웃기긴 하지만 10년 뒤에 난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러고 있을 것 같다. 내 뉴스레터를 받아보는 분들은 "얜 뭐야?"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요즘 너무나 당연하게 그게 느껴진다. "얘 김칫국 마시네" 하고 웃으셔도 상관없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은 잃을 게 없는 상태에서 얻고 있다.
이런 순간이 인생에서 딱 한 번 온다는 걸, 어쩌면 나는 지금 처음으로 알게 된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때가 좋았지"를 지나고 나서야 한다. 그런데 요즘 나는 그 안에서 느끼고 있다. 이게 작은 것 같지만 사실은 굉장한 일이다. 현재를 현재로 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으니까. 적어도 난 그랬다.
돌이켜보면 과거의 나는 '지금'을 살지 못했다. 항상 다음 단계를 봤다. 작은 성취든 큰 성취든 이루어내면 잠깐 기뻐하고 그 다음을 바라봤다. 이 회사 다음에는 저 회사, 이 나라 다음에는 저 나라, 이 타이틀 다음에는 저 타이틀. 지금은 그 발판이고, 진짜는 그 다음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지금 이 자리에서 좋은 것들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이미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보지 못한 채, 아직 오지 않은 것들을 향해 달렸다. 그래서 항상 불안했고, 조급했다. 그 불안함을 연료로 달렸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는 걸 안다 그렇지만 힘들었다는 것은 부정하지 못 하겠다.
그런데 요즘은 다르다.
오늘 내가 올린 글에 누군가 반응했다는 것. 오늘 나눈 커피챗에서 새로운 관점을 얻었다는 것. 오늘 아침 일어나면서 오늘은 어떤 일이 생길까 기대됐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 이것들이 전부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들이고, 지금 이 순간에만 이 형태로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10년 뒤에 성공해있을 나는, 아마 지금의 나를 부러워할 것이다. 아직 모든 게 가능성이었던 시절을. 결과가 없어서 오히려 아무것도 잃을 게 없었던 시절을. 하나하나가 전부 처음이었던 시절을.
그러니 지금 이 시간을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 빨리 다음 단계로 가야 한다는 불안을 잠깐 내려놓아도 된다. 지금 이 자리가 이미 충분히 좋은 곳이라는 것을, 이제는 지나고 나서가 아니라 지금 느끼고 싶다.
나의 가장 행복한 시기는 10년 뒤가 아니다. 아마도 지금,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