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혹은 잉글랜드 남부에서 일해본 사람이라면 특유의 '돌려 말하기' 문화에 익숙할 것이다. 예를 들어 회의 중에 "That’s a very interesting idea(흥미로운 아이디어네요)"라는 말을 들으면 긴장해야 한다. 겉으로는 칭찬 같지만, 실제로는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예의상 들어는 줄게"라며 완곡하게 거절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런던 사람들과 일할 때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보다 그 뒤에 숨은 진짜 의도를 파악하는 데 꽤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한다.
하지만 북아일랜드 동료들은 다르다. 그들이 "That’s interesting"이라고 말할 때는 비꼬는 의미가 없다. 정말로 내 이야기가 신선해서, 혹은 본인들의 생각과 달라서 호기심이 생겼을 때만 그 단어를 쓴다. 돌려까기가 아니라, 진짜로 궁금하니 더 설명해 달라는 신호다. 물론 그들도 부정적인 의미로 이 단어를 쓸 때가 있다. 하지만 런던처럼 '형편없는 아이디어'를 예의 바르게 포장하는 용도가 아니다. 북아일랜드 동료가 낮고 느린 목소리로 "Hm... that's... interesting"이라고 한다면, 그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좀 이상한데(Weird/Odd)?"라는 순수한 의아함의 표현이다. 구별법은 간단하다. 목소리 톤을 들으면 된다. 톤이 올라가며 밝게 "Oh, that's interesting!"이라고 하면 '진짜 호기심'이고, 톤이 낮게 깔린다면 '이상한 소리'라는 뜻이다. 어느 쪽이든 런던처럼 돌려 말하지 않으니, 나는 그들의 투명한 목소리 톤이 오히려 고맙다. 적어도 "칭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욕이었다"는 뒤통수는 맞을 일이 없으니까.
'Maybe(글쎄/아마도)'라는 단어의 쓰임새도 다르다. 런던에서 "Maybe"는 보통 "지금 거절하면 분위기가 어색해지니까 나중에 핑계를 댈게"라는 뜻의 회피용 단어에 가깝다. 반면, 북아일랜드 동료들에게 'Maybe'는 정말로 가능성이 반반일 때만 쓴다. 만약 안 되는 일이라면? 굳이 애매한 단어 뒤에 숨지 않는다. 그냥 "No"라고 하거나 "I don't think that works"라고 명확하게 선을 긋는다.
이런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 북아일랜드의 역사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해가 간다. 그들은 수십 년간 이어진 분쟁과 사회적 갈등 속에서 살아왔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거친 현실을 견뎌내야 했기에, 그들은 불필요한 겉치레나 가식을 싫어하는 성향이 강하다. 힘든 상황을 유머로 넘기는 특유의 '내공'과 복잡하게 돌려 말할 시간에 본질만 이야기하는 '실용주의'가 그들의 DNA에 깊게 박혀 있는 것이다.
솔직히 처음 입사했을 때는 이런 직설적인 화법이 당황스러웠다. 말이 워낙 빠르고 거침없어서 '혹시 나한테 화난 건가?'라고 오해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켜보니 나한테만 그런 게 아니라, 동료나 상사에게도 똑같았다. 그들에게 직설화법은 무례함이 아니라, 서로를 동등하게 대하는 그들만의 방식이자 효율적인 소통 수단이었다.
외국인으로서, 그리고 효율성을 추구하는 내 성격상 이런 환경은 오히려 일하기 편했다. "Good"면 진짜 좋은 거고, "No"면 아닌 거다. 복잡한 속뜻을 유추하느라 눈치 볼 필요 없이 오롯이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100% 리모트 근무라 표정을 볼 수 없다는 한계는 있었다. 그래서 초반에는 그들의 목소리 톤이나 말의 속도, 침묵의 길이 같은 비언어적 신호를 파악하려고 꽤 노력했다. 덕분에 이제는 굳이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분위기만으로 그들이 원하는 바를 꽤 정확하게 캐치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가끔 웅얼거리는 동료를 만나면 당혹스럽긴 하다. 한 번은 미팅 전 스몰톡을 하는데, 유독 웅얼거리듯 말하는 동료가 내게 물었다. "When are you coming to Newry?" (뉴리에는 언제 올 거예요?)"
북아일랜드 특유의 억양과 웅얼거림이 섞인 그 질문을, 내 귀는 이렇게 필터링해버렸다. "Where are you based, Newry?" (거점이 어디예요, 뉴리인가요?)"
런던에 살고 있는 나에게 "뉴리에 사느냐"고 묻는 줄 알고 완전히 엉뚱한 대답을 늘어놓았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제는 자책하지 않는다. 한국 사람끼리도 웅얼거리는 말은 못 알아듣지 않는가? 다른 사람 말은 다 들리는데 유독 한 사람 말만 안 들린다면, 그건 내 리스닝 실력이 아니라 상대방의 딜리버리 문제라고 결론 내렸다. (아님 말고!)
런던의 세련된 화법도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일할 때만큼은 북아일랜드의 투박하고 명확한 소통 방식이 나에게 더 잘 맞는 것 같다. 헷갈리게 하지 않는 솔직함, 그게 그들과 일하는 가장 큰 장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