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해고 그 후 1년 후
작년 정리해고 해프닝이 일어난 지 이제 1년이 다 되어간다. 정말 딱 이맘때쯤 통보를 받았기 때문에 딱 1년 지난 셈이다.
1년 후의 소회를 해보려고 한다.
그때를 돌아보자면 그 상황에 스트레스를 정말 많이 받고 있었기 때문에 퇴사가 후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내가 선택받지 못했다는 감정이 깊게 남았고, 그 감정은 한동안 나를 조용히 잠식했다. 사실 지금도 약간의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한때는 '내가 회사에 들어가면 회사가 망하나?'라는 망상을 할때도 있었다... 그게 참 가짢은 망상이었다는 걸 깨닫기까지 1년이 좀 안되게 걸린 셈이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 타지에서 겪은 정리해고라는 상황이 꽤나 크게 나를 할퀴고 갔던 것 같다.
한 3-4개월 정도 재취준을 한 셈인데 누구는 굉장히 빨리 취직을 했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정말 FOREVER처럼 느껴질처럼 긴~~~~시간이었다. 2024년, 1년동안 안 먹고, 안 입고, 주말없이 악착같이 일하며 모은 돈을 까먹으면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내 미래에 투자하며 그 시간을 견디는 건 지금도 생생하게 괴롭고,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경험이자 시간이었다. 그때 한국의 복잡한 사회 분위기가 이 상황을 신경을 덜 쓰게 해줘서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그리고 이제 시간이 흘러 지금은 영국의 나름 큰 회사, 이 업계 탑20 안에 드는 곳에서 전략사업개발팀으로 일하고 있다. 별다를 것 없다고 느껴 바꾼 업계였지만 완전 다른 업계였고, 훨씬 재밌기도 하고 발전가능성이 아주 큰 분야여서 더 열심히, 재밌게 일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사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그 때의 '정리해고'가 날 또 다른 세계로 업! 시켜준 셈이긴 하다. '적성'이라는 게 이런 것이구나 싶을 정도로 재밌고, 쉽게 느껴지는 일을 풀재택으로 하면서 매니저한테 칭찬과 조언을 받으며 많이 배우고 있는 나날들이다. 그리고 예전보다 내 사업으로의 확장이 훨씬 피부로 느껴진다.
요즘 한국 상황을 보면, '올해 초에는 한국이 이렇게 될 줄 알았나?' 싶다. 내 개인적으로 그 정도의 급격한 변화는 아니더라도 나름의 많은 변화를 거쳤다는게 1년을 돌아보니 새삼 느낀다. 낯선 나라에서 하루 하루를 쌓아가며, 이젠 예전처럼 불안하거나 초조하지 않다. 2025년 1년내내 '영국'이라는 나라를, 내 손으로 오게 된 이 나라를, '런던'이라는 차가운 ㄱ새끼의 도시를 사랑...까지는 못하지만 조금은 좋아해보려고 노력한 1년이었다. 이 나라에 온 지 3년쯤 지나니 숱한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내 이름으로 인정받는 순간들이 하나씩 늘어나고, 그게 내 삶의 속도를 천천히 바꿔놓았다 느낀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전 회사가 시리즈 B투자를 받는데 드디어 성공했다는 뉴스와 영국지사 대표님이 회사를 그만두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솔직히 근황도 궁금했고, 왜 나오게 되셨는지도 알고 싶었다. 그래서 조심스레 연락을 드렸다. 메세지를 드리자마자 전화가 오셨고, 얼굴보고 얘기하자고 하셔서 예전에 내가 면접을 봤었던 곳에서 다시 뵈었다. 오랜만에 뵈었지만 낯설지 않았다. 예전에도 가깝긴 했지만 보고서와 일정 이야기만 하던 사이였는데, 이날은 오랜만의 포옹으로 시작해 서로의 다음 라이프 챕터에 대해 이야기했다.
대표님은 내가 어떤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 지 유난히 궁금해하셨다. 그리고 그림책 작가로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엔 눈이 반짝이셨다. 본인도 예전에 자신은 글을 쓰고, 동생은 그림을 그려서 그림책을 꼭 만들어보고 싶으셨는 데 여태까지 해보질 못 했는데 나는 하고 싶은 일을 시도하고, 이미 실행하고 있다는 것에 놀라워하셨다. 그리고 내가 동물약회사에서 일하시는 걸 매우 흥미로워하시면서 본인도 펫 관련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셨다. (본인이 사업을 차리게 되면 꼭 도와줘야 한다는 얘기도 하셨다.)
내가 회사를 떠나고 그 이후 이야기도 해주시고, 대표님의 최근 근황을 듣다가 한국가서 내 전시에 오시겠다며 그때 다시 보자고 하고 그날은 헤어졌다.
그리고 그 다음 날인가? 기다렸다는 듯 전 회사 전략팀장님에게서 연락이 오셨다. 바이오유럽 때문에 유럽에 와계셨는데 런던에 들릴 일이 있으니 시간이 된다면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메세지였다. 그 순간 문득 웃음이 났다. 예전엔 내가 그들의 연락을 기다렸는데, 이제는 그들이 내 소식을 궁금해하고 있었다.
이 과정을 통해 내심 내가 일 할 때 일을 못 한 건 아니구나 + 나 지금 잘 살고 있구나 하는 검증 아닌 검증의 시간도 거쳤던 것 같다.
그때 당시 내가 미워하던 사람의 근황을 들으며, 이제는 신경이 전혀 쓰이질 않을 만큼, 그리고 그는 이 포지션을 역량부족으로 포기했고, 난 더 큰 회사에서 그것도 외국어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내가 선택한 길이 맞았구나를 깨닫게 해줬다.
전략팀장님도 회사에 남아 있으면서 현타를 많이 느끼신 듯 보였다. 곧 떠날 준비를 하시고 있다했고, 그때 우리를 내보내야 했던 상황이 내심 아쉬우셨던 듯 그때 상황을 몇번이나 언급하시면서 그때 회사가 얼마나 힘들었는 지에 대해 얘기하셨다. 나는 그저 다시 만나 이제 진정한 전략 BD로써 요즘 업계 트렌드에 대해 이야기하니 정말 재밌었다.
두 분 다 능력자시고, 경제적 자유를 누리시는 분들인데 두 분 다 공통적으로 하시는 말은 '회사 안에서의 안정보다, 자기 일을 하며 느끼는 자유가 더 중요해졌다'고 하셨다. 그 말을 듣는데 나도 그 사실을 깨닫는데 올해 1년을 투자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나는 타지에서 내 밥벌이를 모두 잃었을 때 그 사실을 깨달았다는 점이 참 아이러니하면서도 감사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제 서른초반인 나이에 그걸 깨달았다는 게 새삼 운이 좋다고 느껴졌다.
게다가 두 분 다 나보고 “사업을 차려봐요. 시작하면 꼭 연락 줘요.”라고 하셔서 왜 다들 이런 반응이실까 순수히 궁금해졌다.
전략팀장님께서 “1년 만에 훨씬 성숙해진 것 같다'고 메세지를 주셨는데 이제 웃으면서 그분들을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내가 성숙해진 증거가 아닌가 싶었다.
1년 전엔 내가 선택당하지 못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스스로 선택하며 사는 쪽이 되어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기다림의 자리가 바뀌는 게 이렇게 조용히, 그리고 어느 순간 내 코 앞에 와있는 일이라는 걸. 그래서 참 인생은 모르고, 한 순간 순간 고통스럽고 괴롭더라도 버티고, 잘 살아내야 하는 것 같다. 한 해, 한 해 내년엔 (더) 좋겠지 기대하며 요 몇 년간을 살았던 것 같은데 어쩌면 그게 인생일 지도 모르겠다. 좀 더 나아지겠지라는 희망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내는 거. 그렇게 살다보면 어느 날 문득 조금 더 성숙해진 내가 서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