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살이의 흑과 백
얼마 전, 정말 좋은 공연을 보고 왔다. 공연을 보면서 ‘역시 런던에 살고 있으니까 이런 가격에 이런 공연을 볼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튜브 안에서, 문득 영국 생활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적어보고 싶어졌다. 사실 제대로 정리해서 써본 적은 없었는데, 막연히 장점과 단점이 반반쯤은 된다고 여겼다.
런던에서 사는 장점과 단점을 하나씩 적어보니 이런 내용이 나왔다.
장점 첫째, 워라밸이 확실하다. 회사 일 외에 개인 시간을 충분히 쓸 수 있고, 일 때문에 다른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압박이 거의 없다. 둘째, 저렴한 가격에 공연, 전시 같은 문화생활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셋째, 내 삶의 선택을 누가 간섭하지 않는다. 주변에서 인생에 대해 간섭하거나, peer pressure 같은 사회적 압박을 느낄 일이 별로 없다. 넷째, 힘든 환경에서 스스로 단단해지는 에너지가 생긴다. (이건 엄마가 추가해준 장점이기도 하다.)
단점 단점은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첫 번째는 높은 집값과 생활비, 비싼 물가. 월급에 비해 고정지출이 많아서 저축이 쉽지 않다. 둘째, 비자 문제등 '영국에 살기 위해서' 드는 에너지와 돈이 너무 많이 든다.
셋째, 넘을 수 없는 문화의 벽이 있다. 아무리 영어를 잘해도 현지인 사이에 완전히 섞이기는 쉽지 않다. 어딘가 ‘이방인’이라는 벽이 항상 느껴진다. 넷째,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 특히 가족이나 오랜 친구가 곁에 없으니, 외로움을 느끼기 쉽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기도 쉽지 않다. 다섯째, 날씨. 겨울이 너무 길고, 해가 짧아지면 우울감이 심해진다. 여섯째, 서비스 수준. 은행, 병원, 택배 등 일상 서비스의 속도나 정확도가 전반적으로 떨어진다. 문의나 처리가 빠르고 확실한 경우가 거의 없다. 일곱째, 버스‧지하철 등 대중교통에서 예측 불가한 문제가 자주 발생한다. 그리고 정말 비싸다. 여덟째, 음식 선택 폭. 입맛에 맞는 음식을 찾기가 생각보다 어렵고, 맛있다고 느끼는 음식이 별로 없다.
영국살이의 장단점 리스트를 적어보니, 단점 쪽이 정말 압도적이었다. 내가 쓴 장점은 겨우 3개, 엄마가 1개를 더 보태줘서 총 4개. 반면 단점은 8개. 결과는 4:8. 솔직히 이날은 좀 충격이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렇게 영국에서 버티며 살고 있는 걸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남아 있는 이유는 내 시간과 삶의 선택권이 넓다는 장점이 아직 나에게는 크게 느껴지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저걸 글로 적고 나니 ‘과연 내가 영국에 계속, 아니 영원히 살아야 할까?’ 이런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비자상 2027년 말까지는 영국에 있을 수 있는데, 그때를 데드라인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돌아보면 그동안 오직 여기에 살기 위해 쏟아부은 노력, 돈, 시간이 너무 많았다. 물론 “무조건 떠나겠다!”라는 건 아니고, 남기로 완전히 마음을 닫은 것도 아니다. 다만 기간을 정해두면 ‘난 어차피 계속 있을 거야’ 하면서 미뤄두던 일들을 그만 미루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어제 <영국에서 하고 싶은 일 + 영국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을 적어봤다. ‘2년밖에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해야 할 일들이 의외로 술술 떠올랐다.
미래에 내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영국에서 남은 시간을 2년이라 생각하며 살아보려고 한다. 그래야 떠날 때도 덜 아쉽고, 만약 떠나지 않는다 해도 지금 이 순간을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지난달, 물에 빠졌던 일이 있었다. 물속에서 숨이 넘어갈 때, 이런 생각이 스쳤다.
‘나 진짜 열심히 살았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스위스 호수 한복판에서 죽는 건가?’
물론 어딘가에서는 ‘이렇게는 안 죽겠지’ 하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순간적으로 별별 생각이 다 들었었다.
우리는 진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앞으로는 더더욱,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기로 했다. (다행히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은 돈이 많이 드는 것들이 아니라 정말 다행이다.) |